- 한일여고 초대 교장 거쳐 김천예술고 설립한 교육·예술계 선구자
- 85세에도 아천제일교회서 복음의 선율
-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두 손으로 찬송”
주일 아침, 김천 아천제일교회 예배당에 찬송이 울려 퍼진다. 성도들의 찬송을 받쳐주는 피아노 앞에는 경륜의 노(老)피아니스트가 앉아 있다. 올해 85세인 이신화 김천예술고등학교 설립자다.
세월은 그의 모습을 더욱 깊고 고고하게 만들었지만 건반 위에 올려놓은 두 손에는 여전히 힘이 있다. 그가 한 음 한 음 눌러 만드는 선율은 이제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고 감사이며,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온 한 예술인의 신앙고백이다.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현재 아천제일교회 1부 예배 반주자로 매주 피아노 앞에 앉는다. 화려한 무대도, 박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할 수 있도록 묵묵히 건반을 두드린다.
▮ ‘사람에게 들려주는 음악’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음악’으로
그의 85년 인생에서 피아노는 그렇게 새로운 의미로 이어지고 있다.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1942년생으로 김천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연주자 한 사람으로 머물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음악과 교육의 꿈을 후배 세대에게 물려주는 길을 선택했다. 한일여자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이후 김천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며 김천은 물론 경북 예술교육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1986년 문을 연 김천예술고는 지방 중소도시에서도 뛰어난 예술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신화 설립자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 교육의 지평을 넓히며 수많은 제자에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줬다.
2001년 당시 이신화 교장은 김천예술고를 소개하면서 음악과와 조형예술과를 통해 전국의 우수한 예술 인재를 선발하고, 실기뿐 아니라 예술인으로서 갖춰야 할 인격을 기르는 교육에 힘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세운 학교에서는 수많은 학생이 꿈을 키웠고, 그 가운데 가수 김호중을 비롯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예술인들도 배출됐다.
교육은 성적 좋은 학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라는 그의 교육철학도 남달랐다. 어려움을 겪던 학생을 받아들이는 데 교사들의 우려가 컸을 때에도 그는 “이런 학생을 받아서 잘 가르치는 것이 미션스쿨인 우리 학교가 할 일”이라며 책임을 자청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것은 음악 이전에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바라본 교육자의 모습이었다.
▮ 수천 명의 제자를 가르친 손, 이제 찬송을 연주하다
평생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의 손은 예배가 있는 날이면 아천제일교회 피아노 건반 위에 놓인다. 젊은 시절의 피아노가 예술을 향한 열정이었다면, 지금의 피아노에는 감사와 신앙이 더해졌다.
교회 반주는 독주회와 다르다. 반주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들의 목소리를 받쳐주고 찬송과 기도가 하나님께 향하도록 돕는 자리다. 그래서 이신화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더욱 특별하다.
85세라는 나이에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지만, 매주 정해진 시간 예배당에 나와 성도들의 찬송을 위해 건반 앞에 앉는다는 것은 단순한 연주 활동을 넘어선다.
그것은 봉사이며 사명이고, 음악으로 드리는 예배다.
피아노 건반은 88개다.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그 검고 흰 건반 사이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젊은 시절에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찾았고, 교육자가 된 뒤에는 제자들의 꿈을 찾았으며, 이제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 건반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찬송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이 나이까지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죠”
고령의 피아니스트들이 오랜 세월 연주를 계속하는 이유를 이야기할 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음악이 삶 그 자체가 됐다는 것이다. 이신화 피아니스트에게도 나이는 음악을 내려놓아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85세에도 두 손으로 건반을 누를 수 있고, 귀로 찬송을 듣고, 성도들과 호흡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다.
그의 연주에는 젊은 연주자의 화려한 기교와는 또 다른 울림이 있다. 한 사람의 85년 인생, 음악가와 교육자로 살아온 세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기억, 그리고 노년에 더욱 깊어진 신앙이 한 음 한 음에 함께 실려 나오기 때문이다.
▮ 85세에도 멈추지 않는 손끝, 다음 세대에 남기는 메시지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이신화 피아니스트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것도 가장 낮고 드러나지 않는 예배 반주자의 자리다.
평생 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가르쳤던 교육자가 이제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또 하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예술에는 정년이 없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도 나이의 경계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주일마다 피아노 앞에 앉는 모습은 후배 음악인과 제자들에게도 특별한 메시지가 된다. 예술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자신이 받은 재능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수많은 제자에게 음악을 가르쳤다면 이제는 자신의 뒷모습으로 가르치고 있다.
85세에도 예배시간보다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치고, 성도들의 찬송을 기다리는 노피아니스트의 모습 자체가 하나의 교육이고 하나의 설교다.
그에게 피아노는 더 이상 직업도 명예도 아니다.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에 감사하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돌려드리는 ‘달란트의 봉헌’이다.
▮ 교육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복음으로
이신화 피아니스트의 삶을 돌아보면 한 가지 길이 보인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교육으로 사람을 키웠고, 예술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었다. 그리고 지금은 찬송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있다.
그가 평생 심어온 예술의 씨앗은 김천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김천예술고등학교는 그가 남긴 가장 큰 교육적 자산 가운데 하나이고, 그 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제자는 그의 삶이 남긴 또 하나의 작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신화 피아니스트가 마지막까지 완성하고 싶은 작품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송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예배가 시작되기 전 피아노 앞에 앉는다. 성도들이 찬송가를 펴면 경륜의 피아니스트가 조용히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린다. 전주가 시작되고 예배당에 찬송이 번지면 그의 손끝도 함께 기도한다.
85세의 피아니스트에게 이제 무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수백 명이 박수를 보내는 공연장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교회의 피아노 한 대와 함께 찬송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꿈도 거창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제게 연주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시는 그 순간까지 피아노로 찬송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의 손이 건반에서 내려오는 날이 오겠지만, 그가 김천의 교육과 예술에 뿌린 씨앗과 예배당에 남긴 찬송의 울림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평생 음악으로 사람을 가르쳤던 스승, 이제는 그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피아니스트, 아천제일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이신화의 피아노 소리는 그래서 단순한 반주가 아니다.
한평생을 건반과 함께 살아온 노(老)음악인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평생의 찬송’이다.